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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21세기 유럽 축구선수-1. 이탈리아-3. 프란체스코 토티

7번째 이탈리아 축구선수는 국내에서는 인성 쓰레기 선수라고 비난받지만

as로마와 아주리(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별명) 군단의 보배인 AS로마 그 자체 프란체스코 토티이다.

1976년 9월 27일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에서 태어난 그는(역시 DNA부터 로마였다.)

AS로마와 로마(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교황이랑 동급으로 본다.)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센터 포워드(2000년대 초반까지)와 공격형 미드필더(2000년대 중반부터)로 뛰었는데,

정확한 킥력과 연계 플레이, 날카로운 슈팅 등으로 유명하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로디차리(이탈리아-이 클럽도 로마에 있다.)에서 뛴 이후

유스 시절부터 2017년 은퇴할 때까지 AS로마에서만(1989-2017) 뛰었는데,

통산 619경기에서 250골을 기록하며(1992년부터 2017년까지)

AS로마 통산 최다 출장, 최다 득점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원클럽맨이었던 그에게 아쉬운 것은 클럽 수상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2000-01시즌 스쿠데토(세리에A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린 것과

(일본의 나카타 히데토시도 당시 로마 소속이었다.),

2회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2006-07,2007-08)과

2회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우승(2001,2007)을 달성한 것 빼고는

당시의 라이벌이었던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

(유벤투스의 레전드, '신사는 숙녀(유벤투스 애칭)를 두고 떠나지 않는다떠났잖아요 형님'라는 명언을 남겼다.)에 밀린

2인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토티와 델 피에로는 양강의 라이벌을 이루었는데,

토티는 거의 매번 델 피에로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나이(델 피에로-1974년생, 토티-1976년생)와

포지션(델 피에로-공격형 미드필더,센터 포워드, 토티-센터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이 비슷하기에

더 많은 비교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티는 멋진 활약을 많이 보였는데,

그의 시그니처인 칩샷과 화려한 롱패스, 날카로운 프리킥 등을 선보이며 로마의 황제의 위엄을 과시했다.

골을 넣고 셀카 세레모니를 보인 토티, 셀카고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7년, 은퇴식 당시의 토티, 황제의 폐위식은 참으로 슬펐다.

2010년대 들어서는 주로 주전보다는 교체로 뛰었다.

2014년 쯤에는 골을 넣고 위의 사진처럼 셀카 세레모니를 선보였는데,

그 덕분에 팬들은 그에게 '셀카고자'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이렇게 막판에는 유쾌한 모습도 보여 줬는데,

2017년 은퇴식에서는 그답지 않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며

로마 팬들(토리노나 밀라노의 팬들은 웃었을지도 모르지만)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영원한 황태자로 남을 줄 알았던 데 로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플로렌치: 아니 ㅅㅂ, 펠레그리니: 이적할까?)

클럽 통산 786경기 307골을 기록했다.(AS로마 최다출장/최다득점자)

지금도 논란이 있는 헐리우드 액션 퇴장

침 뱉고 폴센과 기싸움 중인 토티

2000년대 아주리 에이스였던 토티

이탈리아 국가대표에서의 토티 하면 한국인들은 '침 뱉고 헐리우드액션 하는 얍삽한 인성 쓰레기'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우둔하고(로마에서는 토티 유머집이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공격 자원이었다.

물론 토티가 한 행동들은 잘못하긴 했지만, 그의 실력은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뛴 그는 통산 58경기에서 9골을 기록하였다.

2번의 유로(2000-준우승,2004)와 2번의 월드컵(2002,2006-우승)에 출전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공격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비에리 의존증'으로(인자기가 있었지만 주전은 아니었다.) 골머리를 앓았고,

2000년대 중반에는 그 비에리마저 노쇠해서 공격이 안 풀리는 시절이었다.

그런 이탈리아에게 토티는 한 줄기 빛이었는데,

리그 라이벌이었던 델 피에로가 이상하게 국가대표에서 부진한 것도 있었지만,

로베르토 바조 이후 오랜만에 나온 이탈리아 판타지스타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4-4-2 혹은 윙어가 없는 5백 전술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플레이가 대부분 중앙으로 쏠렸다.(그래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윙어 카모라네시를 귀화시킨 것도 있다.)

당시 주전 공격수였던 비에리나 서브인 인자기 모두 중앙 위주의 플레이였기에 다양성이 부족했는데,

토티와 투톱을 이룰 시 공격이 다양해졌다.

2002년 월드컵과 2004년 유로에서는 본인이 출장을 제대로 하지 못 했는데,

당시는 비에리 의존증이 절정에 달하기도 했고,

감독이었던 트라파토니가 토티를 별로 안 좋아했던 면도 있는 것 같다.

이후 리피가 지휘봉을 잡으며 토티도 기회를 얻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06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2006 월드컵 당시에는 토티 주전에 인자기,질라르디노,이아퀸타,토니 등이 파트너를 이루었는데,

토티는 약간 처진 위치에 서면서(지금의 AT마드리드와 비슷한 전술)

스트라이커에게 기회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에이스라는 위상과는 달리 기록은 초라한데(58경기 9골),

2000년대 초반 트라파토니와의 갈등이 컸던 것 같다.

교황과 토티

위에서 설명한 대로 로마의 일부 팬들은 토티와 교황을 동급으로 본다.

토티가 만난 교황은 요한 바오로2세(폴란드 출신, 1978.10.22~2005.4.2)였고,

어린 시절 교황이 보듬어준 이 어린 아이는 성년이 되어서 교황과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혹자는 로마 총리(현재는 AS로마의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나

이탈리아 대통령(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는 유명인사이다.

https://m.blog.naver.com/ilt9525/22170050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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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log.naver.com

토티의 결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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