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적을 축구선수는 '리틀 카이저' 미하엘 발락이다.
독일 최고의 미드필더로 불리며, 공수 밸런스와 중거리슛 등이 강점이었다.
'차붐'을 존경한다고 했던 그를 한 번 적어 보겠다.
(내용 출처: 위키백과 영문판/나무위키)
1976년 9월 26일 동독 드레스덴주 괴를리츠에서 태어났다.
선수시절 중앙/공격형 미드필더였다.
189cm/80kg라는 우수한 피지컬을 보유했다.
플레이 스타일은 다음과 같다.
공수 밸런스가 뛰어난 육각형 미드필더로, 특유의 묵직한 중거리슛이 인상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로 2008 오스트리아 전에서 나온 프리킥 골)
또한 패싱력/슈팅력/피지컬/활동량/리더십 등이 뛰어난 미드필더였다.
다른 선수를 돕는 역할도 뛰어났다.
한마디로 '만능'이었다.
1983년 BSG 모터 '프리츠 헤커트' 칼-막스-스타드에서 유스를 뛰며 축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5년을 뛰었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켐니츠(독일) 유스에서 뛴 바 있다.
1995년 8월 4일 켐니츠에서 데뷔했다.
당시 분데스리가 2부리그 소속이었고, 라이프치히 전에서 데뷔했다.(1:2 패)
이 시즌 켐니츠는 3부리그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 중앙 미드필더로써의 뛰어난 활약으로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에 본따서
'리틀 카이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3부리그로 팀이 강등되었음에도 발락은 팀의 핵심선수로 활약했다.
경기를 결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승격에는 실패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보인 바 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당시 감독 오토 레하겔은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의 이적을 추진했다.
Chemnitzer FC II | 1994–95 | Oberliga Nordost Süd | 7 | 2 | – | – | – | – | 7 | 2 | [16] | ||||
1995–96 | Oberliga Nordost Süd | 11 | 3 | – | – | – | – | 11 | 3 | [16] | |||||
Chemnitzer FC | 1995–96 | 2. Bundesliga | 15 | 0 | 1 | 0 | – | – | – | 16 | 0 | [64][65] | |||
1996–97 | Regionalliga Nordost | 34 | 10 | 1 | 0 | – | – | – | 35 | 10 | [16][66] |
켐니츠 시절 기록이다.
1997년 카이저슬라우테른(독일)로 이적했다.
1998년 3월 28일 바이엘 레버쿠젠 전에서 1군 데뷔전을 치루었다.
1997-98 시즌 팀은 1부리그로 승격했고, 그 해 분데스리가 우승까지 차지했다.승격팀이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처음이었다.
1. FC Kaiserslautern[82]
수상 기록이다.
다음 시즌 서서히 주전선수로 도약을 하고 98-99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출전하여 8강까지 갔으나
같은 리그 소속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게 된다.
1. FC Kaiserslautern | 1997–98 | Bundesliga | 16 | 0 | 2 | 0 | – | – | – | 18 | 0 | [67] | |||
1998–99 | Bundesliga | 30 | 4 | 2 | 0 | 1 | 0 | 6 | 0 | – | 39 | 4 | [68] |
카이저슬라우테른 시절 기록이다.
1999년 7월 1일 22살의 나이에 바이엘 레버쿠젠(독일)로 이적했다.
당시 410만 유로(약 54억)의 이적료를 기록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크리스토프 다음과 클라우스 토프모어는 발락에게 공격적인 롤을 부여하였다.
이 덕분에 발락은 1999-00 시즌 무려 27골을 기록하게 되었다.
2000년 1무만 거두면 우승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하지만 운더하팅 전에서 자책골을 기록했고, 팀은 0:2로 패하며 바이에른 뮌헨에서 우승을 넘겨 주었다.어쩌면 미하엘 발락의 '콩'의 저주의 시작일 지도 모른다.
이후 2001-02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준우승을 거두었다.
그 유명한 지단의 왼발 논스톱 발리슛이 결승골이 된 경기였다.
Bayer Leverkusen
- DFB-Pokal runner-up: 2001–02
- UEFA Champions League runner-up: 2001–02
수상 기록이다.
개인상 기록이다.
Bayer Leverkusen | 1999–2000 | Bundesliga | 23 | 3 | 0 | 0 | 0 | 0 | 2 | 2 | – | 25 | 5 | [69] | |
2000–01 | Bundesliga | 27 | 7 | 2 | 0 | 1 | 0 | 5 | 2 | – | 35 | 9 | [70] | ||
2001–02 | Bundesliga | 29 | 17 | 4 | 0 | 1 | 0 | 16 | 6 | – | 50 | 23 | [71] |
바이엘 레버쿠젠 시절 기록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결국 바이에른 뮌헨(독일)로 이적했다.
2002년 1290만 유로(약 160억)의 이적료를 기록했다.
첫 시즌 리그와 DFB포칼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다음 시즌인 2003-04 시즌 리그와 DFB포칼은 준우승에 그쳤다.(모두 베르더 브레멘 우승)
2004-05 시즌 다시 더블을 기록하였다.
2005-06 시즌에도 더블을 기록했다.
하지만 팀이 챔스에서 부진하자 발락은 챔스를 우승할 만한 팀을 찾고 있었다.
마침 맨유와 첼시가 관심을 가졌다.
Bayern Munich[82]
수상 기록이다.
- Footballer of the Year (Germany): 2002, 2003, 2005; runner-up 2008[84]
- kicker Bundesliga Team of the Season: 2001–02, 2002–03, 2004–05, 2005–06[85][86][87][88]
- kicker Man of the Year (Mann des Jahres): 2002[89]
개인상 기록이다.
Bayern Munich | 2002–03 | Bundesliga | 26 | 10 | 5 | 4 | 0 | 0 | 7 | 1 | – | 38 | 15 | [72] | |
2003–04 | Bundesliga | 28 | 7 | 3 | 2 | 1 | 2 | 8 | 0 | – | 40 | 11 | [73] | ||
2004–05 | Bundesliga | 27 | 13 | 4 | 3 | 2 | 2 | 9 | 2 | – | 42 | 20 | [74] | ||
2005–06 | Bundesliga | 26 | 14 | 5 | 1 | 0 | 0 | 6 | 1 | – | 37 | 16 | [75] |
바이에른 뮌헨 시절 기록이다.
2006년 5월 15일 첼시(잉글랜드)로의 이적을 결심했다.
발락은 첼시에서 커리어를 끝내기를 바랬다.
2006년 8월 27일 블랙번 로버스 전에서 epl 데뷔전을 치루었다.
9월 12일 챔피언스리그 베르더 브레멘 전에서 데뷔골을 터트렸다.
2006년 9월 17일 리버풀 전에서 모하메드 시소코의 다리를 밟아 퇴장을 당했다.(1:0 승)
2006년 10월 21일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서 EPL 데뷔골을 기록했다.
첫 시즌 실망적인 활약으로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2006-07 시즌 뉴캐슬 전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20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졌다.하지만 이후 좋은 활약을 보이며 존 테리, 프랭크 램파드 등이 빠졌음에도주장 역할을 잘 수행했다.
이 시즌 리그/챔피언스리그/리그 컵 모두 준우승하며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했다.
Chelsea[82]
- Premier League: 2009–10[83]
- FA Cup: 2006–07, 2008–09, 2009–10
- Football League Cup: 2006–07
- FA Community Shield: 2009
- UEFA Champions League runner-up: 2007–08
수상 기록이다.
2008-09 시즌 스콜라리가 부임했는데, 당시 데쿠에 밀리며 1.5군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스콜라리 경질 이후 히딩크가 부임하며 완전히 적응하게 되었다.
램파드-발락-에시엔 트리오는 세계 최고의 중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08-09 시즌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희대의 오심만 없었다면 우승도 가능했을 것이다.
2009-10 시즌에는 FA컵을 우승했다.
결국 빅이어는 들지 못했고, 젊은 선수들로 세대교체를 준비 중이던 첼시였기에
발락은 곧 이적을 암시했다.
Chelsea | 2006–07 | Premier League | 26 | 5 | 3 | 1 | 6 | 0 | 10 | 2 | 1 | 0 | 46 | 8 | [76] |
2007–08 | Premier League | 18 | 7 | 2 | 0 | 0 | 0 | 9 | 2 | 0 | 0 | 29 | 9 | [77] | |
2008–09 | Premier League | 29 | 1 | 6 | 3 | 1 | 0 | 10 | 0 | – | 46 | 4 | [78] | ||
2009–10 | Premier League | 32 | 4 | 4 | 1 | 2 | 0 | 6 | 0 | 1 | 0 | 45 | 5 | [79] |
첼시 시절 기록이다.
이후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2년을 더 뛰고 2013년 6월 5일 은퇴했다.
한 스타의 퇴장이었다.
- Bayer Leverkusen Squad of the Century[91]
개인상 기록이다.
Bayer Leverkusen | 2010–11 | Bundesliga | 17 | 0 | 0 | 0 | – | 3 | 2 | – | 20 | 2 | [80] | ||
2011–12 | Bundesliga | 18 | 2 | 1 | 0 | – | 6 | 1 | – | 25 | 3 | [81] |
레버쿠젠 2기 기록이다.
총 기록(-2013.6.5): 604경기 149골
독일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U21 대표팀을 거쳤고,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활약한 바 있다.
1999년 4월 28일 스코틀랜드 전에서 데뷔했다.
디트마어 하만과 교체투입되어 데뷔하였다.
유로 2000 명단에 포함되어 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63분 출전에 그쳤고, 독일 또한 A조 4위로 탈락했다.(녹슨 전차)
2년이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루디 푈러 감독은 3-4-1-2를 들고 대회에 나섰다.
발락은 미로슬라프 클로제, 올리버 칸 등과 함께 독일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였다.
조별리그부터 4강까지 꾸준한 활약을 보였고, 특히 8강 미국전과 4강 대한민국전에서 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4강에서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을 결장했고, 결국 브라질에 0:2로 패하고 말았다.
유로 2004 때는 올리버 칸 대신 주장으로 나섰다.
하지만 역시나 팀은 D조 3위로 탈락했다.
2006 독일월드컵에도 출전했다.
첫 경기 코스타리카 전은 부상으로 결장했지만, 이후 5경기를 출전했다.
에콰도르/아르헨티나 전에서 MOM을 획득했고, 대회 베스트11에도 선정되었다.
독일월드컵 이후 당시 코치였던 요아힘 뢰브가 감독직을 물려받았다.
유로 2008이 사실상 마지막 국제대회였다.
주장으로 참가했고, 중원에서 팀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B조 3차전 오스트리아 전에서 멋진 중거리 프리킥 골을 성공시켰다.
비록 결승전에서 스페인에 패했지만(0:1 패), 발락은 대회 베스트11에 선정되었다.
2010 월드컵은 FA컵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결장했고, 곧바로 독일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녹슨 전차 시기에 독일을 이끈 중원 사령관이었다.
공수 밸런스가 뛰어났으며, 간간히 터지는 묵직한 슈팅이 인상적이었다.
- FIFA World Cup runner-up: 2002; third place: 2006
- UEFA European Championship runner-up: 2008[82]
- FIFA Confederations Cup third place: 2005
수상 기록이다.
개인상 기록이다.
Germany U21 | 19 | (7) |
Germany | 98 | (42) |
독일 대표팀 기록이다.
한때 우스갯소리로 '콩락의 저주'라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밥 먹듯 준우승했던 '홍진호(콩)'에 빗댄 것이었다.위에 보다시피 많은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여담으로 차범근을 존경했다.한국에 왔을 때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라고 언급한 바 있다.